제51집: 하늘이 가는 길 1971년 11월 0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7 Search Speeches

신앙생활의 본질

적병을 뒤에서 맞아 싸워야 하는 하나님의 입장인 것을 알고 '하늘이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내가 앞장서서 싸우겠나이다. 정면에서 저를 돌봐 주시지 않더라도 저는 당신이 가시는 길을 당당코 가겠나이다. 어서 이 길을 갑시다' 하고 재촉하고 권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나에게 대드는 원수를 방어해 주고 대신 싸워줄 수 있고, 또 내가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행동을 같이함으로 말미암아 원수세계에서 탈피할 수 있고 사탄의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데리고 가지 못해요.

이렇게 보게 될 때에 '하늘이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가? 위험천만한 자리, 자기의 생명이 다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하늘이여 나를 돌보지 마시고 당신이 가셔야 할 이 이상 심각한 자리로 어서 가시옵소서'라고 하게 된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이 적진을 향하여 전진해 나가기 전에 이 무리를 끌고 가는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자리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가야 할 길 앞에는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이 틀어지면 언제든지 공격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나를 피해 주고 나를 돌보지 말고 전진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자가 가야 할 길이요.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오늘날 기독교 교인들 혹은 목사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전부 다 하나님에게 뭘 해달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딸 중심삼고 '뭐 해주십시오' 혹은 자기 교회 중심삼고 '뭐 해주십시오' 그렇게 수천년 동안 기도해 온 교단이 어찌하여 지금 와서는 무력해졌는가?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는 방향권과 하나님이 전투하고 있는 전쟁 마당과는 별도의 환경에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대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미칠 수 없고 올 수 없는 거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그 환경적 터전이 세상과 다른 것이 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냥 그대로의 방향이요 그냥 그대로의 환경이요 그냥 그대로의 생활체제요 그냥 그대로의 모임이라 할진대는, 그 가운데에 하나님이 갈 수 있고 하나님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할 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이미 떠나 지나간 자리가 아니냐 하는 것은 두말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어떠냐? 그런 환경에서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해 보게 될 때, 여러분들이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는다구요. 무슨 문제가 생겨 가지고 자기가 수습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날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이제야 진짜 깨달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어려움을 당했다면 거기에는 기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일한 자리에서 '아이고, 어렵습니다. 하늘이여,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면, 하나님이 전진해 나가던 그 전선을 뒤에 두고 후퇴하여 자기를 이끌어 주라는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여러분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번번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전체를 위해서 선두에 서 가지고, 국가적인 최후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고, 혹은 세계적인 최후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보조를 맞추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그 입장을 버리고 후퇴해 가지고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한다면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가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이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만큼 벌을 받아야 된다구요. 벌을 피해 가려는 자세보다 자기가 행한 데 대한 응보를 당연한 것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벌을 주는 데있어서 열만큼의 벌을 줘야 하는데, 사탄이 '에이 요녀석, 잘못했다`고 하면서 열 이상 혹은 백만큼의 벌을 주는 날에는 하나님이 동원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접근시킬 수 있는 길은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선두에 서서 전진하고 있는 하나님은, 낙오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 전선을 지켜야지 개인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무리 기도해 보라는 거예요. 그건 일각이라도 도와줘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그런 자리에서는 전우가 아무리 '아무개야, 내가 죽게 되었으니 같이 가자'고 해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전선에 있어서 승리를 촉구하고 국가에 충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결의가 불타면 불탈수록, 그런 심정이 앞서면 앞설수록 그 동지를 제하고 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전선에 있어서 최후를 결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 동지가 부르짖는 그 말을 중심삼고 거기에 관심을 갖다가는 도리어 자기 스스로가 불리한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냐.

그럴 때에 자기의 아무리 가까운 동지라 할지라도 그를 뒤에 두고 네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배가의 책임을 내가 다해 내겠다고 도리어 선두에 서서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동지에게는 원수처럼 보이고 위해 주는 친구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동지를 위하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 동지 때문에 보다 나을 수 있는 승리를 다짐했다면 그 승리는 그 동지와 더불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아니냐. 그렇게 되면 그 동지는 죽은 후에라도 나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렇게 볼 때, 자기를 돌보는 것보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버리고 간 사람이 도리어 자기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신앙길에서 언제나 끌려 다니는 무리가 아니었느냐 '가자' 해도 가겠으면 가고 말겠으면 말고 하는 마음자세를 가진 사람은 하늘길을 못 갑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사탄한테 걸려 있는 사람입니다. 사탄한테 걸리게 되면 사탄은 삼면에 닻을 걸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꽁꽁 묶어 놓는 것입니다. 만약 통일교인이 그렇게 되었다면, 번번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면, 닻만 달아 놓겠어요? 꽁꽁 묶어 놓고 삼면으로 구속해 놓을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거기서 항거를 했다, 끊고 갔다 할 때는 그것을 끊고 가면 갈수록 차후에는 점점 용서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을 믿고 따라 나왔지만,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사탄세계에서도 갈래야 갈 길이 없는 구속된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그 누가 동정할 것이냐. 하나님도 동정을 못 하고 사탄도 동정을 못 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 충성을 다해 정성을 들여 가던 사람들이 끝까지 못 가게 될 때는 그 사람들의 말로가 비참한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후손까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강사의 자녀들 중에는 훌륭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그것을 알아야 돼요. 책임자의 자리라는 것은 참 두려운 자리라는 거예요. 부흥강사면 부흥강사가 자신이 잘나서 하나님의 은덕을 입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부흥회면 부흥회 가운데에서, 역사적으로 선조의 선한 공적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나도록 택해 세워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택해 세우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어떤 선도자가 있어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책임진 부흥사를 내세워서 그 사람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사는 자기가 잘나서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기를 통해 역사한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가 동기가 되어 가지고, 움직임이 전부 자기로 말미암았다고 생각 하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신령한 사람들이 몇 년, 한 7년쯤 가다가는 다 내리닫아 꺼꾸러지는 것입니다. 전부 다 자기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자기로 말미암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응당 자기가 받을 은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사하며 교역자면 교역자, 부흥사면 부흥사에게 제물을 바치게 될 때, 그 제물을 하늘에 직접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늘의 제물을 받았으면 대신 하늘 앞에 드려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 제물을 하늘 앞에 드리지 않고 자기가 타고 앉아 가지고 자기가 소화시킬 때는 자기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족이 걸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짊어진 사람이 하나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관계되어 있는 나라면 나라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가정이면 가정. 일족이면 일족 전체가 걸려 버립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건 안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부흥회면 부흥회 때에 인연 되는 그 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 시간을 통해 인연 된 것이 아니라 수천년 동안, 선조들이 그 한때를 맞기 위해서 인연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는 얼마나 심각한 자리인지 모릅니다. 그 한 사람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가려 갈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배후의 사연을 중심삼고 신앙길을 가는 개인과 하늘의 인연이 묶어져 나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신앙길을 간다는 우리의 생활을 반성해 보면 볼수록 하나님 앞에 슬픔을 많이 남기고, 빚을 많이 졌다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