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집: 복귀의 기점 1970년 03월 1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0 Search Speeches

내적인 것부터 버려야

그러면 어디서부터 버릴 것이냐? 외적인 것부터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누구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 내적인 것을 버려야 됩니다. 외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적인 것까지도 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내적인 문제가 무엇이냐? 자기를 중심삼은 심정적 인연관계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형제가 문제입니다. 형제를 붙들고 그냥 복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붙들고 그냥 복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처자를 붙들고 그냥 복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만물을 붙들고 그냥 복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는 외적으로 내적으로 버려야 됩니다.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빼앗아 갑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버리든가 빼앗기든가 둘 중의 하나는 해야 합니다. 아벨은 자기 스스로가 택한 자리가 아닐지라도 빼앗기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복귀해 가야 할 운명길에 서 있는 우리 자신, 우리 가정, 우리 민족, 우리 국가, 우리 세계가 그런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를 하나 만든다 하더라도 최후의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된 그 세계에 그냥 그대로 들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 자신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땅 위에 천국이 찾아왔으니 천국 살림을 하자고 할 때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청산지어야 할 여건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안팎으로 남아 있는데 외적으로는 그 세계와 그 나라와 그 민족과 그 만물이 있는 것이요, 내적으로는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부모와 처자와 형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청산지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라고 하신 이 말은 그냥 그대로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자기의 생사를 결정짓는 심각한 말이었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만 그 부모를 그냥 그대로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청산지어야 할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그냥 그대로 붙들고 사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사랑해야 됩니다. 돌아오려면 부정해야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모친이 우는 것을 보고, 요한을 가리키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요한이 당신의 아들이고 자기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와 가지고 어머니를 맞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직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현현하신 것을 바라보고 `랍비여!' 하면서 예수님을 붙들려고 할 때에 자기의 몸을 붙들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건 왜? 아직까지 청산지어 가지고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못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하오니…. '라고 했지만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부정의 과정을 거쳐서 다시 긍정받을 수 있는 자리까지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리에 돌아가지 않은 마리아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완전히 버리는 자리에 서지 못했던 마리아를 보고 예수님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