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집: 김경계 여사 추념예배 말씀 1983년 03월 29일, 한국 본부교회 Page #294 Search Speeches

세계적인 탕감복귀의 기반을 닦기 전-" 가정을 돌보지 못해

그런 섭리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가 기독교를 대신해서 세계적 기준까지, 모든 안팎의 실력으로 봐 가지고 이것을 대치해서 기독교가 사명 못 한 것을 우리 원리에서 말하는 탕감복귀를 해야 돼요. 그런 기독교 기반을 대신해서 통일교회를 세계적으로 닦을 때까지는 가정을 돌보게 되어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이게 서러운 복귀섭리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한테 편지 한 장을 못 했고, 형님이 있고 다 이렇더라도 연락 한 번 못 한 거예요. 감옥에서 나오면서도…. 세상 사람들 같으면 그런 불효가 어디 있어요?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그렇게 많이 수고하셨어요. 뭐 천리길이 넘는 그곳을 매달 한 번씩 오기 위해서 미싯가루를 해 가지고, 그다음에는 감옥에 있는 자식이라고 해 가지고 그 겨울에도…. 흥남은 상당히 춥습니다. 바람 불 때는 자갯돌(자갈)까지 날아갑니다. 그런 데에서 춥겠다고 뭐 있는 정성을 다해서 명주바지를 안 해오는가 온갖 정성을 다하신 거예요. 한 달에 한 번씩 그렇게 왔다 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예요.

오시게 되면 내가 무슨 얘기를 하나? 그때만 해도 내가 냉정하게 얘기를 하던 것이 지금도 생각이 나요. '내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어머니 앞에서 눈물 흘리는 그런 자식이 안 되겠다. 그보다도 더 큰 뜻을 품고 가니까 그때 가서는 아실 거야' 이러면서 지냈어요.

그러면서 뭐 미싯가루를 갖다 주면 하루 저녁에 전부 다 나누어 주고, 또 좋은 옷을 갖다 주면 나는 안 입고 전부…. 언제나 와 보면,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이거예요. 그게 죽을 지경이지요. (웃음) 부모가 정성을 다해 가지고 자식이라고 천리 먼 길을 찾아와 가지고 갖다 넣어 준 차입품을, 귀한 물건을 전부 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딴 사람들이 입고 다니고 말이예요, 자기는 언제나 종아리가 보이는 그런 옷을 입고 다닌다 이거예요. 그런 걸 보면 참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식이 가는 길의 모든 것을 한때는 아실 것이다' 그러고 나갔어요.

부모가 이북에 계신 것을 알면서도, 내가 감옥에서 나와서 평양까지 와 가지고도 고향에 못 갔습니다. 얼마든지 갔다 올 수 있었는데도 못 갔던 거예요. 그때에 고향에 못 간 것은 내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나를 따르던 식구들이 전부 어느 처소에 널려 있는지 궁금해서, 기억되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을 수습해 가지고 다 통고하고 나서 고향에 가야 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게 하늘을 따라가는 정도라는 거예요.

그런 놀음을 하다 말고 1·4후퇴 당시 갑자기 후퇴함으로 말미암아 고향을 못 들어가게 되었던 거예요. 이러한 정세가 될 것을 예측했었지만, 남한에 가야 한다는 것을 예측했었지만 고향을 못 들르고 급급히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고향의 부모와 형제들은 모두 다 학살됐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삼팔선을 넘을 때에 내가 기도하기를 '내가 이렇게 고향을 두고 떠나는 것은 반드시 하늘을 위해서 가는 것이요, 내가 돌아오게 될 때에는 내 손으로 이북을 해방하고, 내 고향땅을 찾아와서 하늘의 승리를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한 시간이 있기를…' 이랬어요. 그 기도를 중심삼고 지금까지 싸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기성교회의 핍박, 대한민국의 핍박, 아시아를 거치고 세계의 핍박을 거쳐가면서 오늘의 통일교회 기반을 닦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책임 못 한 기반을 대치할 수 있는 기반까지 다 닦았습니다. 또 현재의 기독교인들이 세계의 문제를 중심삼고 여러 가지 세계적인 기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직접적으로 세계의 무대에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 못 돼요. 지금까지 내가 닦아 놓은 모든 기반은, 현실 세계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거예요. 현재 기반 닦은 그 기준이 기독교가 갖고 있는 기반 이상의 기준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