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집: 나를 알자 1986년 01월 21일, 한국 본부교회 Page #144 Search Speeches

혼자 있어 가지고" 내가 누구다 하" 걸 결정할 수 -어

이렇게 볼 때, 오늘 '나를 알자' 하는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진정 알려면 누구를 알아야 되느냐?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말이에요, 자기 혼자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자기의 주변에 누가 있느냐 하면 부모가 있고, 그다음에 형제가 있습니다. 부모와 형제가 있는 가정에서 나는 누구다 하는 위치를 찾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혼자 있어 가지고는 자기의 위치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다 하는 것을 결정할 수 없어요.

그리고 또 '나'라는 것을 두고 보면 '나'라는 속에는 남자 여자가 다 들어간다구요. 내가 누구냐 할 때, 남자 여자로서 내가 누구냐 하는 말이 아니라구요. 여자가 '내가 누구냐' 할 때 여자의 자리에서 내가 누구냐 하고, 남자도 '내가 누구냐' 할 때 여자를 부정하고 내가 누구냐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남자 여자를 인정한 자리에서 '나'라고 하는 거예요. '나'라는 자체를 갈라놓으면 남자 여자예요. 남자 여자로 갈라진 '나', 그 '나'는 나만의 '나'가 아니라 상대적 환경을 갖추고 있는 '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라는 남자를 알려면 여자를 몰라 가지고는 안 돼요. 안 그래요? 또, 여자를 알려면 남자를 몰라 가지고는 안 돼요. 생리적 구조로 볼 때, 왜 이렇게 생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이렇게 생겼어?'라고 묻는다면 '내가 이렇게 생기고 싶어 생겼다'고 답할 사람이 있어요? 왜 이렇게 생겼느냐? 그것은 부모로부터 전통을 이어받아 가지고 태어나다 보니 이렇게 여자로 태어났다 이거예요. 그건 상식, 보편화된 사실에 의한 나를 긍정하는 지식이지, 근본적인 면에서 여자가 왜 이렇게 생겼느냐 하는 문제, 왜 이렇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는 근본문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개념을 세우는 데는 나만 똑 떼어 가지고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로 태어난 나를 생각하게 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여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자의 상대적 세계를 몰라 가지고는 '나'라는 것을 해명할 길이 없다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로 태어난 나 혼자, 현재의 평면적 입장을 중심삼은 나를 갈라 가지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있기 위해서는 거기에 반드시 부모가 있는 거예요, 부모.

그러면 나는 어떠한 존재냐? 나무로 말하면 하나의 가지면 가지이고 잎이면 잎인 것입니다. 그 나무의 가지나 잎이라 하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는 종대가 있어요. 그 종대를 중심삼고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 그 가지 가운데에 수많은 잎이 연결되어 하나의 나무를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동으로 뻗은 한 나무의 가지와 같이 여러분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아, 나는 귀한 존재다. 내가 제일이다' 그러고 싶지요? 이 나무 뒤를 바라보면 나라도 있고 세계도 있지만, '아, 그거야 몰라, 다 몰라. 내가 제일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 환경은 부정하는데 내가 제일이다 주장하면 그 자체가 모순이예요. 제일이라는 그 개념 가운데는 비교 개념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이예요. 안 그래요? '내가 제일이다. 내가 높아져야 된다. 내가 절대 져서는 안 된다'는 말은 벌써 스스로가 환경의 여건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딱 떼어 가지고 '위에도 나 외에는 없다. 좌우에도 없다. 전후에도 없다. 미래에도 없다. 나만이다' 하는 존재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거예요. 그런 존재가 있나 찾아보라구요. 아무리 광물세계의 하나의 원소를 우리가 파헤쳐 보더라도 그 원소가 원소만으로 있기 위해서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 원소는 또다른 상대적 원소를 반응시키기 위해서, 동반하기 위해서 있다는 거예요. 그 자체는 모르지만 그게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자기 존재를 인정하기 전에 선유(先有)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