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집: 예수님의 한 1968년 01월 1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48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슬""이 된 예수님의 죽음

오늘날 우리들은 고아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고아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잘사는 가정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한 고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류는 본래의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참형제를 잃어버렸고, 참부부를 잃어버렸고, 참자녀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처럼 고아와 같은 내 자신을 볼 때 편할 리가 있습니까? 이 몸은 재촉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재촉하느냐? 본연의 부모와 형제, 본연의 자녀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느냐? 본연의 부모를 찾는 데는 이 지구를 돌고 돌아도 찾을까말까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도 찾을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니 어디 가서 찾는단 말입니까?

그러니 이제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 사무쳐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죽음의 길도 어떠한 험산준령도 가겠노라고 다짐하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것을 아버지가 찾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런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골고다의 길도 마다하지 앉고 갔습니다. 그러나 찾다가 안 되니 결국 죽음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본연의 부모와 상봉할 날을 고대하던 무리가 부모의 그 모습을 붙들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주여' 하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언제이겠습니까?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이 중심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세상의 어떤 주의나 사상 보다도, 혹은 자기 아들딸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그분이 그리워 못 살겠다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한 번 만지고 싶어하고, 그분의 손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어하는 그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로 나와 인연 맺어져 있으니, 그 품에 안겨 지난날의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얘기할 수 있고, 그 수고로움을 친히 위로드릴 수 있는 한 때를 맞는 것이 온 인류가 찾아 나가는 최고의 소망인 것입니다.

말씀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도, 행동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도, 그 자체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 자체를 붙들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마음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부모를 다시 만나기 위하여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고 또 보고 싶어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민을 위하여 독생자인 예수를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보낸 것은 천대받게 하려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역사 이래 단 하나의 중심 존재로서 만민의 아버지로 예수님을 보냈으므로 만백성은 그분을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해야 하고 만나서 기뻐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했던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간다는 말씀을 남기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