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집: 하늘과 현실 1970년 03월 0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40 Search Speeches

현실적인 가치를 지녀야 할 나

이런 것을 미루어 볼 때, 하늘의 뜻을 대하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불가피하게 현실적인 무대를 중심삼고 결정지어야 할 각자의 운명이 지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시간과 순간을 중심삼고 연결됩니다. 그러니 똑딱하는 순간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체험했겠지만 은혜는 똑딱하는 순간에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전등을 두고 말하게 된다면 이것은 청평의 발전소에서 인연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되기 위해서는 물의 낙차로 터어빈을 돌려 발전기가 돌아감으로써 발생한 전기가 송전소를 통해 여기까지 들어오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여기까지 들어와서 접촉되는 것은 현실입니다. 스위치를 켜는 순간 불이 반짝하는데 이 순간이 전기로서의 최종의 결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기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과정이 없다면 우리 인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인데, 스위치를 누르는 그 순간 비로소 현실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인간과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발전소와 같다면, 중간과정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직접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중간 과정이 필요한 것 같이 영계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협조를 해야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직접 접선시키느냐? 누군가가 뜻과 더불어 접선시켜 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실적 입장에서 연결되게 될 때에는 뜻과 더불어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염려해야 합니다. 은혜는 자기를 염려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뜻에 일치되어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해야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해 나온 기준과 뜻에 일체가 되어 강한 힘으로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여기에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걸어 나온 생애노정을 전부 다 청산 짓더라도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믿고 나온 기간만은 잊을 수 없어야 합니다. 영원히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때는 자기를 중심삼은 기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뜻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엄벙덤벙한다면 세월을 따라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가 버린 세월은 다시 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심각하게 뜻을 파고 들어가 흘러간 세월을 도로 가지고 와야 되겠다고 하는 입장에 서 보았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하루 24시간 중에서 시간적으로 얼마나 뜻을 중심삼은 생활을 해보았으며, 얼마나 뜻을 현실화시켜 생활해 나갔으며, 얼마나 뜻의 필요성을 느끼며 이것을 추진해 나갔느냐를 생각해 볼 때, 과연 내가 그런 시간을 몇 시간이나 가져 보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생명과 더불어 뒤넘어치는 한때가 필요한데, 자기의 오관이나 이목구비를 통해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나 직관, 혹은 관념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이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져 보았습니까?

여러분들 중 은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보이는 모든 만물이 옛날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같은 것인데도 아침에 보아도 새로운 것이요, 저녁에 보아도 새로운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거기에 하늘의 은사가 물결쳐서 접선되게 될 때에는 입체적인 신비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자아를 자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한 석가모니의 말처럼 무한한 가치를 지닌 자기의 고귀성을 찬양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뜻을 따라 나온 여러분들 가운데 과거의 생활을 회고해 보며 그때가 좋았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과거가 좋아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통일교회에서 오래된 사람들 중에는 60년대가 좋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무엇이 좋았습니까?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환경을 중심삼고는 좋지 못했던 것입니다. 좋다는 것은 개인의 특정한 한계권내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입장에서 전체가 하나된 관계를 지닌 자리에서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민족적이요, 국가적이요, 세계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 좋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영원한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지 않은 환경이 온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여 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학위 자체가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어떻게 지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과거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어느 한때 그럴 수 있는 순간을 가졌습니까? 그럴 수 있는 순간이 연결 되지 않고는 현실에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루는 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루의 기쁨이라는 것은 순간의 어떤 인연에 부딪혀서 그 인연과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혼자 있는데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대기준을 중심삼고 맞부딪쳐서 안팎과 상하가 서로 바꾸어질 수 있고, 서로가 도울 수 있는 자리에서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이 어느 한 때에 현실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그 현실적 내용 가운데에는 개인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요, 가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요, 국가, 세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반 위에 서야 하나님께서 개재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