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집: 본 되는 생활로 실적을 남기라 1990년 10월 14일, 미국 알래스카 코디악 Page #361 Search Speeches

소련은 문총재의 은덕을 잊을 수 -을 것

지난번에 미국의 부시하고 소련의 고르바초프하고 워싱턴 디시(D. C. ) 에서 회담 했잖아요? 「예」 그때 미소연합대학을 만들기로 공약했습니다. 그건 뭐냐면 이제 앞으로 서로서로 교류하는 대학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선 첫 계획이, 미국의 젊은이들과 소련의 젊은이들 천 명씩 교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합의한 것입니다. 그것을 몇 달이 지나도록 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5백 명의 학생들을 연수 끝냈다구요. 이제 명년 7월이면 3천 명이 끝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그래서 이번에 사절단이 갔다 왔습니다. 박보희 총재와 일본 사람들, 미국 사람들 해 가지고 총 11명이 갔다 왔는데, 가서 보고받은 것이 뭐냐면 문총재가 모스크바에 안 왔다면 큰일날 뻔했다는 것입니다. 문총재가 노보스티 통신과 인터뷰하면서 얘기한 것 그대로 소련 정부가 해 나오는데 다섯 개의 큰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련에서는 문총재의 은덕을 잊을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 그 노보스티 통신사가 뭐가 됐느냐면 소련 공보처가 됐어요. 그 공보처장관이 얘기한 거예요. 한ㆍ소 국교수립이라는 것은 레버런 문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노보스티 통신 편집요원들을 데려다가 한국의 모든 부흥상을 한 시간짜리 필름으로 만들어 가지고 몇십 번을 전국에 방영했다는 거예요.

소련 국민 가운데는 김일성이 지지파도 많습니다. 공산당 지지파가 많다구요. 한국과는 지금까지 공산세계 70년 동안 적대국 관계에 있었고 한국은 미국의 앞잡이라고 선전해 나온 그 나라가 한국에 관심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좋은 소문도 있긴 했지만 그것이 소련에 소개되지 않았다 이거예요. 그렇지만 레버런 문 중심삼고 한국을 방문한 이 사람들이 전국적인 실황을 보도한 거예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 내가 가서 회의할 때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수십 차례 레버런 문과 한국을 소개한 결과 소련 국민들에게는, 한국이 급속도로 부흥했기 때문에 소련도 그렇게 변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상식이 돼 버렸다는 것입니다. 외무장관에게 내가 침을 놓은 것이지.

이놈의 자식들, 그런 은덕을 모르고 자기들이 잘해 가지고 그렇게 됐다고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하고 있어요. 그래 가지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걸 알아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애국하는 사람들이 알아 줘야 애국합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그리고 노보스티가 원래 통신사였었는데 이번에 공보처가 된 것도 나 덕분에 됐다고 자기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부처가 소를 잡아서 문총재님께 잔치해 드려야 할 텐데 바쁘신 분을 오시라고 초대도 못 하겠고 그러니 귓속말로 제발 언제 한번 빨리 오시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렇다고 내가 찾아가겠어요? 그 대신 두세 시간 동안 고르바초프와 공적으로 만날 약속이나 다리 놓으라고 했어요. 신세졌으면 갚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