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집: 통일교회 1963년 05월 2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60 Search Speeches

시의시대의 할 일

하늘은 정성의 도수를 망각하지 않습니다. 정의에 입각한 어떠한 일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정성을 옹호해야 됩니다. 자기가 그 기준에 서지 못했을 때에는 `나는 그것을 받을 수 없사오니 아버지께서 받아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생각이 참 많습니다. 이런 심각한 한 때를 맞이하면 기도를 많이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이런 것을 내가 압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탕감해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복귀 도상에서 수많은 선조들이 탕감조건을 세우는 과정에서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나는 그 실패의 조건을 탕감하겠다고 하면서 나왔습니다. 나는 그런 실패한 입장에 서지 않겠다고 다짐해 나왔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과거의 선조들과 다른 차원에서 정성들여 나오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에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평면적인 실수요,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알기에 사탄이 참소하려고 하면 `이자식아! 나는 이렇게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 올라서기 위해 얼마만큼 고생의 길을 걸어왔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각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압니까? 여러분은 건달들입니다. 선생님이 정성을 들이고 머리 숙여 찾아오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어 그것을 못 받았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래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을 여러분이 알고 정성 들여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세상의 전문가가 되려고 정성을 들이고 있어요, 그것은 다 한 때의 것입니다. 하늘을 위한 기준을 여러분들이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영계에 가지를 못합니다. 문이 쭉 열려 있는데 가지를 못합니다. 시집은 가야 할 텐데, 누더기를 입고 가겠어요? 신랑은 좋은 예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는데 누더기를 입고 가겠어요? 축복의 문은 열려 있는데 가지를 못한다는 거야.

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을 통과해야 되겠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언제 주님을 모셔 보았습니까?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먹여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느냐'는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처럼 언제 그렇게 해 보았습니까?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한을 풀 길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렇지않습니다.

어떤 면에 서든지 사탄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사탄에게 지지 말라는 거야. 여러분이 아들딸 낳은 것도 전부 사탄에게 걸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대신 하여 조소와 비난과 원통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모심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시의(侍義)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개인구원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가정을 중심삼은 가정구원시대입니다. 과거에는 영계와 육계가 갈라져 가지고 구원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남자는 하늘을 상징하고 여자는 땅을 상징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하늘에서, 성신은 땅에서 구원의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적인 기반을 닦아 나가고 있습니다. 가정적인 기반을 닦는 데 있어서 남편에게 부인이 마음을 맞춰 주면 복을 받는 것이요, 부인에게 남편이 마음을 맞춰 주면 복을 받는 것이요, 자녀들이 하나되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가정구원시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느냐? 하나님의 슬픔은 노아가 하나님을 못 믿은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아의 가정이 하나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못 믿은 것이 슬픔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가정이 하나되지 못한 것이 슬픔이요, 야곱의 가정이 하나되지 못한 것이 슬픔인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한이 맺혀 있기 때문에 가정을 중심삼고 복귀의 기준을 완결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알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선생님이 여러분들의 손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게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선생님은 책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내가 없더라도 이 뜻을 계승해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물어 보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좋은 명사는 다 갖다 붙였으니 하여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감사합니다. 이러니까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뜻과 내용을 알고 생활 가운데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이 된다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