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집: 복귀의 주류 1968년 11월 1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41 Search Speeches

안타까운 심정의 하나님

오늘날 인류가 추구하는 표본적인 인간은 어떠한 인간이어야 하느냐? 하나님이 슬픔을 느끼는 것은 사랑의 실체적 상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체적 상대인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아무리 배짱이 센 혁명적인 일국의 수령이라 하더라도 아들이 죽게 되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눈물이 안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갖추어진 분야와 환경이 넓을수록 거기에 비례되는 곱절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평민이 흘리는 눈물은 그 사람으로서 끝나는 것이지만, 중심적 인연을 갖춘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사연과 더불어 환경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의 치하에 있는 국민으로서 그 분의 슬픔에 동반하지 않는 사람은 반역자입니다. 그럴 거 아니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일 것이냐? 하나님이 정녕 우리 인간과 부자의 관계에 서 계시는 하나님일진대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해 놓으시고 관망만 하셨다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혁명해 버려야 됩니다. 혁명해 버린다는 말이 좀 안 된 말이긴 하지만…….

아담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가 염려했던 대로 되는 구나. 조금만 더 해라'고 했겠어요? 아닙니다. 심장이 오그라들고 모든 감각이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그걸 따먹어서는 안 되느니라'고 피흘리며 떨고 형용할 수 없는 애절한 안타까움 때문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담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있을때 구경만 했겠나 말입니다, 칼이 있으면 역사를 베고, 이 천하를 베어 짤라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입장에 있는 자기 자신을 자탄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것을 기독교인들은 뱀이 속닥거려 가지고 따먹은 것이라고 합니다. 원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얼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하고 안타까웠겠습니까? 역사상의 그 누구보다도 처량하고 그 누구보다도 안타깝고 그 누구보다도 비참했습니다. 아담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심장이 폭발하는 듯한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타락한 인류 시조를 보고 하나님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할머니 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까지도 정성을 들여 천신만고 끝에 7대 독자를 낳아 애지중지 사랑하는데 그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잘 알 것입니다.

타락한 핏줄을 통해서 맺어진 인연도 다 동기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출발한 것입니다. 그 동기의 주체자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여러분이 낳은 자식이 불한당이 될지 역적이 될지 간신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 해와, 그 아들딸은 천하의 어떠한 역사시대에서도 찾을 수 없는 대표자였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사랑을 해도 몽땅 합니다. 인연도 깊은 심정으로 맺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 인류시조가 되었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더냐고 물을 때 그것은 설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설명을 앞서는 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청년 남녀들이 사춘기를 넘어서 이성을 느끼는 것은 배워 가지고 그런 것입니까? 남성은 이래야 된다는 공식과정을 거치고 무슨 대학 학부를 다녀 공부해 가지고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중심삼고 `서로 사랑하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7대 독자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 이상입니다. 또, 그 사랑은 천지의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사실을 막을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해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 모든 내용을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얼마만큼 사랑하려고 하셨을까요? 사랑하는 것을 봤으면……. 얼마나 멋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