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집: 천주복귀의 용사 1965년 01월 2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93 Search Speeches

통일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모진 투쟁이 있-다

그럼 선생님이 이제 말씀 좀 시작할까요? 「예」 한 30분? 「예」 (웃음) 무슨 말씀을 해야 될까요? 응? 기쁜 얘기 할까요, 슬픈 얘기 할까요? 어떤 종류? 기쁜 얘기 할까요, 슬픈 얘기 할까요? 「둘 다 좋습니다」 둘중에 하나 해야지 한꺼번에 그거 둘 다 할 수 있나. 하나씩 해야지요. 슬픈 얘기 해요, 기쁜 얘기 해요? 무슨 얘기? 뭐 할까요? 「기쁠수록 감격이 있습니다」

자, 이제부터는 얘기 좀 하려고 그래요. 옛날로 좀 돌아가서…. 오늘은 말이예요, 선생님이 기분나는 대로 얘기할래요. 아시겠어요? 「예」 기분대로. 기분이 좀 좋지 않으면 욕도 하고, 기분이 좋으면 칭찬도 하고 말이예요, 기분나는 대로 얘기할 테니 그렇게 알라구요.

선생님이 뭐 어디에 간다는 소문이 언제부터 났어요? 횟수로는 5년째예요. 1961년. 원래는 1960년 12월 4일, 12월 4일이지요? 「1959년입니다」 1959년인가? 「예」 그때는 자유당의 이박사 치하에서 여권 만들어 가지고, 상당히 어려운 시련을 받으며 여권을 내 가지고, 그때 전부 다 출국허가까지, 날짜까지 딱 돼 가지고 일주일 남겨 놓고 계산해 나가던 것이 오늘이 되었어요.

우리 합동결혼식도 그래요. 합동결혼식이 10월 5일 그냥 했더라면 선생님이 미국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전부 다 여의치 않아서 한 2주일 연장하는 바람에 모든 게 또 틀어져 나갔어요. 이래 가지고 뭐 혁명을 거쳐 가지고 이렇게 하다 보니 5년 이상이 지나갔단 말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외국 식구들 앞에는 참 면목이 없어요, 본부 식구들도 그렇지요? 예? 여러분들 생각해 봐요. 그들이 모든 정성을 들여서, 자기 생명을 바쳐서 이 길을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마음, 그들이 정성들이는 도수가 크면 클수록 선생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단 말이예요.

그렇게 간다 간다 하기를 벌써 5년, 5년 동안 기다렸으니 그 사람들이 얼마나 내적으로 지쳤겠느냐 말이예요. 응? 그걸 생각하면, 선생님이고 뭣이고 뭐 불신할 정도예요, 불신. 앞으로 하네다 비행장에 척 내리게 되면 일본 식구들이 '아, 그렇게 온다 온다 하더니 이제 지쳐 나가자빠지니까 오니 우리는 모르겠소' 하면 내가 뭐라고 할 거예요? 내가 뭐라고 할 거예요? 또 미국 식구들도 역시 마찬가지라구요. 오신다 오신다 하던 오신다는 그날이 5년여 세월이 지나갔으니 뭐 의리 없고, 뭐 별의별 말을 다 한다 해도 내가 할말이 없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동안 선생님이 기분이 좋아서 못 간 게 아니예요. 그동안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모진 풍파 가운데서 투쟁해 가지고 지금까지 나왔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이만한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는 내적인 투쟁의 과정을 거쳤다는 걸 여러분들이 알아야 돼요.

더우기나 통일교회에 처음 들어온 식구들로서는 우리 통일교회의 내막적인 역사는 모른다는 거예요. 그건 선생님하고 협회장밖에 몰라요. 모른다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참 우리는 환난권 시대를 거쳐오면서, 모진 핍박 가운데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이래 가지고 지금까지 나와서 오늘날 세계적인 발판을 다 닦아 이런 기반을 만들게 되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