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집: 미처 몰랐습니다 1972년 08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1 Search Speeches

"진리만으로, 말"만으로 통할 수 있" 시대" 지나간다"

이러한 인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제자들 앞에 그렇게 간곡히 통고하였던 사정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요한복음 14장을 읽어 보면 알 것입니다.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도 너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누구를 통하여서 들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왔다 간 예수는 성인 중의 성인이었습니다. 예수가 가야할 방향을 확실히 모르는 제자들이 금후의 갈 길을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보았을 때, 비록 그들이 노력한다 해도 현재의 자신들을 중심삼고 노력해 가지고는 천도의 길을 모색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나와 너와 하나될 수 있는 길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비절한 최후의 날을 앞에 놓고 있었던 예수의 심정이 아니었겠느냐? 그것은 당연한 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가더라도 너희와 내가 통할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나니,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 외에는 없다'고 다짐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예수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갔다가 너희들이 있을 곳을 준비해 놓고 다시 오겠다'고도 했고, '너희들은 내 갈 길을 알지 못한다'고도 했습니다. 또한 정성들이는 길에 있어서 예수는 제자들이 자기를 그들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고, 그들의 나라보다 더 사랑하고, 그들의 소원이나 이상보다 더 사랑하고, 자기와 더불어 호흡을 같이하고, 위치는 다르더라도 심정이 일치되고 공감되는 생활권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너와 나는 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에, 남겨진 편지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남겨진 예수의 편지, 즉 남겨진 예수의 말씀의 배후에 숨어 있는 사랑, 알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사랑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그 마음을 중심삼고 너와 나의 하나를 강조했지 그 말을, 그 편지를 놓고 너와 나의 하나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까지 찾아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장벽을 놓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날래야 만날 수 없고 통할래야 통할 수 없는 내연을 앞에 놓은 간곡한 처지의 예수, 불쌍한 제자들을 앞에 놓은 예수가 그 제자들을 위로하는 단 하나의 길로서 그때 전한 그 말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있어서는 죽음이 그들 앞에 들이닥치고, 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고 쓰러져야 할 것을 알았던 예수는 '너희는 죽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자리에서 죽으라'는 그 말을 해야 할 터인데, 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듯 말할 수 없는 예수의 사정과 내면적인 인연이 남아진 것이 성서가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가 사랑하는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느냐? 사랑하고 싶은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느냐, 지극히 사랑한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성서의 가르침은 사랑하고 싶은 자리에서 말한 것이 아니냐. 사랑을 다 하고 난 후에 '너는 이래라' 하고 명령적인 입장에서 한 말은 성서에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만으로 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갑니다. 진리는 참된 이치요, 말씀인데 말씀 가지고 통과하는 시대 가지고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말씀 통과 시대에 실체는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실체의 사랑은 점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말씀의 약속대로 가게 되면 그는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의 사랑을 점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 가지고 또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통과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도 그를 만나 가지고 서로 주고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사랑했느냐? '죽을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 했다. 또 그런 자리에서 사랑받았다. 서로의 사정을 넘어 맹세하고, 하늘을 찬양하고, 혹은 만세를 부르고 가자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받았다' 할 수 있는 자리를 우리 인간 세계의 그 누구도 맞이한 바가 없지 않느냐?

사랑하는 세 제자마저도, 사랑이 무슨 사랑이예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틀림없이 죽는 거라구요. 틀림없이 죽는 예수라구요. 이미 각오한 예수요, 죽음길을 가기로 결정한 예수였습니다. 그러한 비장한 자리, 생사를 판단짓는 자리에서 세 제자는 잠을 잔 것이 아닙니까? 한 번도 아닙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깨어 기도하라고 두 번 세번씩 권고하던 예수의 그 심정적 통일점을 이 땅 위의 어디서 찾아볼 수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가 최후의 길을 가게 될 때에, '당신이 가는 길은 나도 필생의 소원으로 하고 가겠다'고 따라 나서는 제자가 있었다면, 그가 사랑하고 싶었던 그런 제자가 있었다면, 그리하여 같이 죽을 자리에서 갈라졌더라면, 십자가를 지고 나가던 행로에서, 골고다 산정을 향해 십자가의 형틀을 지고 나가는 그 자리에서 일러주고 싶은 말을 일러주었을 것이 아니냐?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 말하고 싶었던 그 사연이 인류역사상에 나타났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제자들의 사연이 달랐기 때문에, 그 엇갈린 사연으로 말미암아 비장한 죽음길에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하늘의 사연을 인류가 이어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비통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