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집: 천국은 나로부터(2) 1971년 07월 2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76 Search Speeches

'천국이 나로부터'라니 얼마나 심각한가

'천국은 나로부터', 이 말을 두고 볼 때, 이 '나'가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심각한 자리냐? 얼마나 우리 인간에 있어서 절대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자리냐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 가운데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 라는 말은 억천만세를 통하여 영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절대적인 내용을 갖춘 자리에서 인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믿는 데서 천국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천국이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 믿는 데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데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미급했고 원칙에 도달하기에 얼마나 먼 거리에 있었느냐 하는 것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혹시 여기 처음 온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을 중심삼고는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는 못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져 가지고 개인을 중심삼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해서 천국이 되느냐? 그건 개인의 천국은 될는지 모르지만 전체 천국은 되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개인의 천국이 아닙니다. 개인이 성립시켜 가지고 소유한 그런 천국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천국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기뻐할 수 있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그를 중심삼고 만국을 횡적으로 연결시켜 가지고 전체 천국을 모색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서 희생시킨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오늘 우리들이 믿고 나가는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인 한계점을 그어 놓고 '나에게는 이것이 절대적이다. 이 신앙을 누가 빼앗아 가랴' 하는 이런 자기 주장을 하는 입장에 서 가지고 하늘땅 앞에 자신을 갖고 외칠 자가 있느냐? 그러한 신앙조차 갖지 못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우리들을 하나님은 거느려 가며, 이끌어 가며 시시각각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통하여, 영적으로 키워 나오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두고 볼 때, 그분이 편안한 자리에서 우리를 키워 주고 일깨워 주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에, 이렇게 해주면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한 번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때에 알아주기를 바라는 믿음,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에 몇 번이라도 수고하고 몇 번이라도 손해보더라도 믿어 주고 또 믿어 주는 놀음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적으로 믿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사망권에 처해 있는 우리 자신들이 곁길로 가려할 때 하나님은 그 길을 막아 주고 가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우리가 사랑스러워서 그러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믿음의 가치가 믿음의 아들 딸로서 나타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 그리운 자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절대적으로 믿고 나가시기 때문에, 몇 번을 좌절당하더라도 인간을 믿어야 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좋아서 그러겠어요, 우리가 좋아서? 이것을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그런 입장에 섰다는 것은 벌써 우리를 믿어 주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입장에서 우리에게 절대적 신앙을 요구한다는 것을 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떠한 체험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체험을 하게 되면 그 체험이, 자기가 정성을 들였기 때문에, 응당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수고하는 가운데 수많은 도인들과 선지선열들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했는데도 아직까지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는 아들딸을 맞지 못한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일대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었다고, 나를 좋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어디까지나 내일의 소망을 앞놓아가면서 그 소망을 연결시키려니 그런 무리라도 가누어 수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기 때문에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거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좋아서 은혜를 주신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라는 거예요.

영적 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교만하고 당당합니다. 그럴수록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환경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앞날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바리새 교인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바리새 교인들은 교만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갖춘 것 같았지만 내심적으로는 갖추지 못했습니다. 벌써 내심적으로는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나라를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제물 과정을 거치고 하나님이 수고한 상대적 여건을 전부 다 갖추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지도 못한 입장에서 '이 시대에 내가 나라를 대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상반된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반드시 오늘날 내가 바라는 나 자신을 극복하지 않고는 올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소원하는 원인이 되는것 몇 분의 일을 남겨 가지고는, 다시 말해 나로부터 동기가 되어 접할 수 있는 소원의 내용을 남겨 가지고는 천국이 오지 않습니다. 누구로부터 소원이 출발되어야 하느냐? 자기로부터가 아니라 상대로부터입니다. 혹은 뜻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동기가 되는 것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