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집: 불쌍하셨던 예수님 1964년 05월 0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5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소원과 통일교회가 출현한 이유

2천년 전 유대 땅에 오셨던 주님, 민족적인 메시아를 맞이하여 국가적인 주권을 세워서 세계적인 출발을 하려 했던 역사는 중단되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중단될 수 없습니다. 하늘적인 기준에서 외형적으로라도 세계적인 발판을 닦아서 그것을 제 2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민주진영과 제2유대교로서의 기독교에게 상속시켜 가지고 일으켜 나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기독교는 통일되어야 합니다. 통일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려 한 책임,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해야 할 책임을 기독교가 하지 못하면 망한다는 거예요. 그러한 사명과 책임을 하기 위하여 통일교회가 나온 것입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당대에 세계적인 복귀를 완성시켜서 만왕의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을 품고 돌아가셨으니 다시 제2이스라엘을 세워서 민족적인 기반을 연결시켜야 될 세계적인 무대에서 만나야 합니다. 또 세계적으로 제2유대교를 세워서 민족적인 출발 지점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와 민주주의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예수님 당대에 했어야 하는데 못했습니다. 그러한 책임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못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에서는 '내가 그런 나라에서 같이 살고 싶고 그 나라에서 거느리고 싶은 참다운 효자는 어디 갔느뇨? 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소망이 완성되는 날, 예수님을 중심삼고 온 천지를 거느리고 하나님 앞에 그 영광을 돌려 드릴 참다운 자녀를 고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상을 가지고 온 예수님이었지만 한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말도 한번 못해 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라 하였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가 원수이고 내가 사는 나라가 원수라는 것입니다. 내 자체에서는 이 몸뚱이가 원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원수고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이 세계가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혈혈단신 고아와 같은 신세로 이 땅에 와 가지고 언제 자신의 소원을 말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성경에 있어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 :49)"라고 했습니다. 불을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불이 안 붙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마음의 답답함이 오죽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중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하시던 예수님의 그 서글펐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분한 마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판국은 그때에 비틀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9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던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30여 평생 동안 고이고이 지녔던 마음, 그 내적인 소신을 예수님은 전혀 피력하지 못했습니다. 그 마음에 철석같은 결의는 갖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말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멍텅구리 같은 제자들이 무슨 사도라고요? 불리하면 내빼는 녀석들이 사도라고요?

그들은 한 나라만을 대표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 앞에 불림 받았던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만을 대표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세계를 대표하고 만민을 대표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명으로 만민을 대표해 나타난 특전대였습니다. 그런데 칼이 무서워 도망을 가요? 목이 달아날까봐 도망을 가요? 그런데도 사도라고요?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동안 다시 찾아가서 수습했기 때문에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일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이 다 죽더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철석같이 맹세한 자들이 뒷걸음을 쳐 도망을 갔어요. 그런 처참한 자리에서 죽어 간 예수님이 사흘 후에 다시 그들을 찾아갈 때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이구, 내가 부활해서 왔다' 하며 기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