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집: 인연의 행로 1972년 07월 16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37 Search Speeches

절대적 신앙은 운명길을 혁신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가 고마운 것은 하나님을 절대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게 혁명의 본위입니다. 알겠어요? 절대 믿어라? 네 자체를 타령하지 마라! 타령해 봐야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알겠어요? 인간들끼리 무슨 죄가 많고 어떻고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평면적으로 보게 되면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잘났다고 했댔자 그렇고, 못났다고 했댔자 그렇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믿어라! 절대적으로 믿으면 일시에 돌파구가 생겨가지고 초월할 수 있는 길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신앙은 운명길을 혁신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알겠어요? 또한 인연도 바로 잡을 수 있고, 관계도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고착된 그 관계를 개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선하려면 새로운 신앙에서부터, 신앙은 새로운 이념에서부터, 새로운 이념은 새로운 사상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이념과 사상을 제창한 인물이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세계적인 성현들이 아니냐 이겁니다.

그 성현들이 추구하던 것은 무엇이냐? 그 골자사상은 자기를 위주로한 사상이 아닙니다. 인간세계로 보면 그들은 약자였습니다. 자기 주장은 없고 오로지 하늘, 하늘, 하늘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양반도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지요? 세상적으로 보면 그게 얼마나 비굴한 사나이 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안 그래요?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도,'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무슨 사내가 그렇게 생겨 먹었어요? 세상적으로 보면 그건 인중지말(人中止末)입니다. 누가 그의 말을 믿겠어요? 졸장부같이…. 사내답게 혁명을 못 일으키고…. 모든 것을 혼자서, 장엄한 자세로 칼을 빼어 들고 원수들이 목을 뚝뚝 잘라 버리는 것이 시원하고 남자답지. 아이쿠, 궁둥이를 하늘로 쳐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건 인간적으로 보면 인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예외의 인물이었더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외의 길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여러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연의 장난은 여러분의 운명 앞에 갖은 슬픔과 비극을 전개시켜 나오고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대의 길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믿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믿고 넘어가야 된다 이겁니다.

어떤 강을 건너뛰게 될 때, 넓이뛰기에 있어서 자기의 기록이 있다구요. 자기의 기록이 4미터 내지 5미터쯤 된다면, 4미터쯤의 거리는 쉽게 건너뛸 수 있지만 5미터라는 한계선을 건너뛰려면 비장한 각오, 지금까지 없었던 비장한 각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넘어야 합니다. 해봐야 죽든지 살든지 둘 중의 하나가 결정됩니다. 알겠어요? 그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건너뛰어야 되는데 '아이구, 건너뛸까 말까! 난 자신이 없는데, 다리가 건너뛰겠지' 그렇게 생각해요? '난 자신 없지만 다리가 건너뛸 것이다' 그러면서 뛰는 녀석이 있어요? 그건 미친녀석입니다. 먼저 마음이 문제 입니다. '좋은 고비다. 이건 문제가 아니다' 하며 심각한 마음으로 그것을 뛰어넘고도 남을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해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넘을까, 될까 말까 이래 가지고 되는 수가 있어요? 이것은 틀림없이 가다가 쿵하고 떨어지는 거라구요.

절대적인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모험을 촉구해 나가는 개척자의 행각의 노정에서는 불가피적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니, 이 권위가 이거 참 얼마나 멋져요? 하나님이 인간을 구도하기 위한 최고의 표어가 아니냐? 안 그래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운명은 여기에서 엇갈리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