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집: 만민을 위하여 오신 주를 모시는 자가 되자 1956년 12월 2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20 Search Speeches

아버지를 위로하시기- 노심초사하신 예수

예수는 우주적인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오셨으나 일생 동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서러움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고 도리어 아버지의 마음 상하심과 염려를 위로하시기에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땅을 바라보고 인간들의 무지함을 용납하여 주기 위하여 애달파하신 예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30여 평생의 눈물의 생애로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수고를 대신하여 나섰기 때문에 죽든지 살든지 아버지의 뜻만을 영광되게 해 드리려는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알아주시든지 말든지 땅 위의 인간들이 알아주든지 말든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때와 장소를 개의치 않고 뜻을 위해 사셨습니다.

뜻을 완전히 이루려고 오셨던 예수였으나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해서 고심하거나 낙망하지 않은 예수였습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나가서도 예수는 자기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과 같이 빌라도의 법정을 통하여 골고다의 산정을 거쳐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는 자리까지 나가면서도 예수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무변명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인간들이 저렇게 반대하는 것도 자기의 책임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예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우리들은 나신 예수로부터 사신 예수를 거쳐 가신 예수의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는 무엇과 친구가 되었느냐 하면, 생명과 친구가 되지 않고 죽음과 친구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역사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길을 갔지만 만민의 죽음을 대신하여 죽음의 친구가 되고, 만민을 대신하여 죽으신 분은 예수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죽음과 희생의 종교요, 기독교의 진리는 죽음을 이기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활동은 자기 일신을 파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원망없이 사랑할 수 있는 예수의 행로였음을 여러분이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친구이셨기 때문에 죽음을 재촉할 때에도 죽음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원수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여유의 생애를 살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나중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까지도'모른다'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는데, 이것은 소망이 절망으로, 생애의 전부가 수포로 돌아갈 것 같기 때문에 외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죽음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가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외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로서는 할바의 책임을 다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자기를 천당으로 보내시든 지옥으로 보내시든 개의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죽음의 친구가 되어야 할 입장에 있었던 예수는 죽는 것으로서 만족하고 죽는 것으로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주적인 사랑을 가지고 오셨으나 그것을 안 자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우신 은사를 가지고 오셨지만 일단 죽음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나선 이상에는 아무런 미련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오셨는데도, 하늘이 소망의 존재로 대해 주시지 않으셔도 반박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던 예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나가는 데에는 최후의 고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정성을 다해 나가더라도 끝에 가서는 하늘이 모른다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늘이 모른다 하는 것은 세계적인 사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예수도 세계적인 사명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도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충성을 다하고 생활을 다 바쳐 아버지께 매달리더라도 하늘이 모른다 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죽어도 아버지 뜻이요, 살아도 아버지 뜻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희망을 갖는다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오직 이 하나의 희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못 먹는 것도 못 입는 것도 기쁜 일이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