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집: 세계에 봉화를 들자 1970년 01월 1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95 Search Speeches

왜 이런 생활을 하느냐

그런 것을 보게 될 때, 내가 무엇 때문에 일생 동안 세상에서 이런 구질구질한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 끌려 다닌 것은 왜정 때부터 끌려다녔어요. 그러나 감옥에 잡혀 들어간 것도 내가 다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지금도 통일교회가 자꾸 크니까 미워서 배 아파하는 패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여러분들이 문선생이 명령만 하게 되면 죽음도 개의치 않고 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본 패들도 그렇지만 말입니다.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계의 어떤 그룹에 못지 않습니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기쁜 마음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가진 사람으로는 내가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가라면 네가 서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사느냐? 2천년 전의 예수님은 형편없는 입장에 있었고, 세례 요한 또한 따르는 패들도 변변찮았는데 그들은 어떻게 역사적인 인물이 됐느냐? 그것은 세계와 더불어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세계? 망하는 세계가 아니라 소망의 세계와 더불어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새로운 세계, 새로운 천국, 새로운 주권자, 새로운 이념, 새로운 인격, 새로운 생활관 등을 만민 앞에 제시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세계와 더불어 살 수 있는 내면을 만민 앞에 소개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렇게 선생님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것도 세계와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죽지 않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밤을 새워 가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렸겠습니까? 눈치를 봐 가지고 옆으로 빠져 나갔으면 죽긴 왜 죽어요? 왜 죽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세계와 더불어 살고자 하시는 것을 제가 아옵니다. 그러나 세계를 위해, 세계와 나라를 위해, 또는 그 나라의 창건을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하니 그들을 대신해서 희생될 수 있는 하나의 대표자가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저에게도 현재의 입장에서 죽음길을 모면하려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리나 아버님이 찾고 있는 인물이 저 자신이라는 것을 아옵니다. 그러니 제가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하나의 희생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만 하시옵소서' 라고 하면서 죽음을 자청하며 나섰던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승리의 깃발을 들고 나선 것입니다. 새로운 봉화를 높이 들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봉화를 들었느냐? 세계를 위하여 봉화를 들었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봉화를 들었다면 그 민족이 망하게 될 때 그 봉화는 헛것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세계를 위해 봉화를 들었기 때문에 그 봉화는 세계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잃어 버렸어도 이스라엘 나라에서 추방당한 기독교는 로마와 서구라파 일대를 거쳐서 세계적인 기반을 닦았던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세계로 갈 수 있는 철두철미한 사상적인 움직임과 내용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민족권에 의해서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에 의해서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스라엘 민족이 망한 것을 밟고 올라서서 세계에 수확의 터전을 넓힐 수 있는 발판을 세워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되었느냐? 세계와 더불어 어떻게 하나될 수 있느냐? 세계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는 문제 등을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면 지닐수록 이는 앞으로 틀림없이 세계를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우주관을 제시했고, 새로운 인생관을 제시했고, 새로운 생활관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니 그것으로 이상이 그려지고 그것으로 보다 나은 영원한 가치관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살고 거기에서 죽었기 때문에 역사 이상에서 사는 것이요, 역사 이상에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식사에 있어서도 그를 중심삼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