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집: 본향 땅 1987년 11월 01일, 한국 용인연수원 Page #14 Search Speeches

교회가 발붙일 수 -" 북한땅

여러분, 선생님이 잘난 사람이예요, 못난 사람이예요? 「잘난 사람입니다」 그래 잘난 문선생이 왜 누구한테 쫓겨서 이남으로 내려왔어요? 「공산주의입니다」 응? 「공산당입니다」 공산주의 때문에 선생님이 쫓겨내려왔나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내려오셨습니다」 (웃음) 내가 이북에 가서 감옥살이하다가 언제 나왔느냐 하면 말이예요, 쫓겨 나온 것이 아닙니다. 1·4후퇴 때, 맨 마지막에 나왔어요.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고향에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 고향에 갔으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다 만날 수 있었어요. 그런데도 왜 이남으로 내려왔을까? 이남으로 왜 내려왔을까? 공산주의가 어떻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공산주의를 세계적으로 청산짓기 전에 고향에 갔다가는 모든 면이 불리해요. 그렇기 때문인지, 선생님이 태어나 살았던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라는 곳은 이남 부락으로 소문이 났었어요, 이남 부락. 그렇게 유명했다구요. 정주 땅에 가서 '이남 부락이 어디요?' 하면, 상사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나도 싫어하지만, 우리 고향 사람들도 공산주의를 제일 싫어했습니다. 이남 부락으로 소문이 났었다구요, 이남 부락으로. 그리니 그 부락에 가서는 이로운 것이 없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삼팔선을 넘은 거예요. 이남 부락의 대표적인 곳이 남한 땅이기 때문에, 여기 남한 땅에 와서 해방의 준비를 하지않으면 안 되겠기에 삼팔선을 넘어온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고향에 우리 어머니가 날 참 사랑했습니다. 뭐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겠지만, 특별히 우리 어머님은 나를 사랑했어요. 그걸 한참 얘기하면 눈물 흘리는 장면 많아요. 그렇게 날 사랑했는데, 그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안 만나 보고 왜 이남으로 내려왔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그런 것이 문제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오지, 왜 혼자 이남에 내려왔느냐?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속한 사람들이예요. 안 그래요? 어머니 아버지는 딴데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나 좋을 때나, 혹은 고통스러울 때를 막론하고 언제나 그 어머님을 찾아가 만날 수 있고 모실 수 있습니다. 알겠어요? 「예」

그러나 남한 땅은 달라요. 그땐 남한이지요? 남한 땅이라는 것은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입니다. 일족과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남한을 구하기 위해서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 땅에 와 가지고 뭘하려고 했느냐? 뭘하려고 했을까?

내가 이북에 가서 감옥에 들어간 것도 무엇 때문이겠어요? 응? 교회 때문에, 교회 때문에 그랬습니다. 교회 때문에 그랬다구요. 북한에서 공산당들이 모든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려고 하는데, 제일 나중에 남은 단체가 우리 단체였습니다. 그땐 통일교회라는 이름이 없었어요. 그저 선생님이 가르치는 하나의 집단이었어요, 이것마저도 전부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돼 가지고 내가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도 해야 될 것이 교회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양에 있는 옛날 식구들을 우선 만나 봤어요. 선생님이 3년 가까이 감옥에 있다 보니, 또 공산당들이 핍박을 하니 드러내 놓고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됐어요. 그래서 점점 지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나와 가지고도 그런 일을 전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남으로 내려오게 될 때 옛날에 인연되었던 모든 식구들을 다 만나 봤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갈 때 그들이 눈물 흘리고 하던 것이 생생합니다. 내가 쇠고랑을 차고 5년 형을 선고받고, 5년 동안 잘 있다가 만나자고 할 때 눈물 흘리던 그걸 생각하면 말이지, 지금도 생생하다구요. 그렇게 해서 나와서 뜻 가운데 맺어진 동지들 식구들을 규합하기 위해서, 찾아오기 위해서 늙은 사람으로부터 젊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생각나는 모든 사람들을 전부 방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