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집: 솔직한 신앙자 1971년 07월 0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38 Search Speeches

신앙자가 현실-서 언제나 문제삼아야 할 것

여러분이 생애를 통해서 선한 결과를 남기지 못할 경우에 여러분은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앞에 빚진 사람이 되는 것이요, 가정이면 가정 앞에 빚진 사람이 되는 것이요, 남편이면 남편, 아내면 아내, 혹은 자녀 앞에 빚진 사람이 아니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결정지을 수 있고 이러한 생활의 전모를 좌우시킬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때가 어느때냐 하면, 바로 오늘이요 현실이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현실은 여러분을 사방에다 줄로 걸어 놓고 잡아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사방의 줄을 똑같이 잡아당기면 언제든지 중앙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커지면 중심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 중심이 기울어졌을 때 자기 혼자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자기 혼자 바로잡기는 힘든 것입니다. 중심이 기울어졌을 때 중심을 자기 혼자 바로잡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길이 있든가,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가지고 자기를 부축해 주는 입장에 서게 되면 바로잡을 수 있으되, 그렇지 않고 기울어진 입장에서 자기 스스로 바로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잘 느껴야 됩니다. 더우기 우리는 아무런 목적 없이 사는 것이 아니고, 큰 목적을 중심삼고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더 많이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까딱 잘못했다가 중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아무리 자기가 노력을 해도 바로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번 잘못해서 중심이 기울어지면 잘못한 것의 몇십 배, 몇백 배, 몇천 배로 노력을 해도 바로잡기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심각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세상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세상에서 무엇인가 한 가지가 틀려지기 시작했다 하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틀려지기 전보다, 그것을 시작하기 전보다 몇십 배 더 준비를 하고 그 이상의 노력을 투입해도 정상적 기준에까지 복귀시켜 놓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이 중심적 기준을 상실하지 않고 언제나 수직이면 수직에 딱 서서 중심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현재의 입장에서 어떻게 유지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중심이 기울어지는 것은 내가 대판 싸움을 하여 상대방에게 망신당했다고 해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한가지 기분 나쁜 일로 인한 감정에서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상대를 보게 되면, 자기를 좋은 면에서 자극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적인 면에서 자기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보게 될 때는, 그 느낌 하나하나가 좋지 않게 느껴지고 자기의 기준이 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고 느끼는 데 있어서 기준이 틀려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상대에 대해서 잘못 느끼고 말을 잘못했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에 꺾여 나가는 때가 많습니다. 하나의 작은 감정 문제가, 하나의 느낌이 여러분의 신앙노정이라든가 여러분의 정상적인 인격생활에 있어서 선악의 문제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봄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이 꺾여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느낌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이 꺾여 나갈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잘못 느끼고 잘못 말함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이 꺾여 나갈 수 있다는 거예요. 자신이 말하고 잘못 행동했을 때는 결정적으로 악한 결과에 부딪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언제나 문제삼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느낌을 바로잡아라, 느낌을 다스려라, 느낌을 잘 보호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모든 느낌에 대해서 각별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고 느끼고 행동하고 말하는 데 있어서 올바르게 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플러스요, 저렇게 저렇게 하면 마이너스라는 확실한 경계선을 가려 가지고 이 이상의 한계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기준을 완전히 결정지어야 될 것입니다. 이 경계선을 넘어선 안 됩니다. 만일 그 경계선을 넘는 날에는 지금까지 닦았던 공적인 터전이 일시에 파탄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많이 느꼈으리라 봅니다.

여러분은 저울추와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많으면 올라가고, 조금만 적으면 내려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저울추가 어느때 정지하느냐, 저울추를 어떻게 완전히 정지시키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완전히 정지시키기 위해서, 저울눈을 잘 맞추어 저울추가 수평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거예요.

그 수평지점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평지점은 하나인데, 그것은 머리카락 굵기보다도 작고, 수로써도 표시할 수 없으리만큼 작은 자리가 아니겠느냐는 거예요. 그야말로 숨 한번 쉬는 시간이 길다는 거예요.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시간에 세계의 수평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는 거예요. 그와 같이 지극히 순간적인, 몇십 분의 일초라는 기준을 중심삼고 여러분 생애의 방향이 왔다갔다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어떠한 한계선을 중심삼고 왔다갔다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배를 타도 그렇다는 거예요.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그 방향에 맞추어 가야 하는데, 나침반이 조그만 흔들려도 왔다갔다하는 거예요. 그러니 나침반이 직행길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진짜 직행길은 못 가리킨다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의 놀음이 여러분이 생활하는 이 순간, 이 시간에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악이냐 선이냐 하는 문제가 여러분이 생활하는 현재의 과정에서 가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순간적으로 잘못하게 되면 과거가 몽땅 달아나는 것입니다. 잘못하게 되면 현실이 몽땅 부정되고, 미래가 완전히 절벽으로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어느 때에 결정되느냐 하면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닙니다. 바로 현재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