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집: 뜻을 품은 예수 1970년 12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29 Search Speeches

인간적인 고뇌를 이겨내신 예수님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부모도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요셉도 몰랐으며 요셉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도 역시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까지도 역시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한 예수님이기에 사연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21)",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21)" 하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보더라도 말할 수 없이 고독한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그러한 고독의 자리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누구냐? 그것은 유대교인들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교인들을 대표하는 족속, 곧 사가리아 가정이요, 요셉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사무칠 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반항심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반항심, 유대교인에 대한 반항심, 사가리아와 요셉 가정에 대한 반항심, 더 들어가서는 자신이 태어날 때 하나님이 보내시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경배했던 동방박사 세 사람에 대한 반항심과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했던 천사들에게까지도 반항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반향의 대상으로 남아질 수 있는 고독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한 그 당시의 환경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민주주의 시대도 아니요,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여 정당을 편성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누구한테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이었으니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루려 했던 뜻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타락된 환경에서 먹고 마시고 놀면서 동반자를 규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런 환경을 분별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동반자를 규합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던 예수님의 괴로움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어떤 성현의 괴로움보다 더 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환경에 몰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단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4천년 동안 괴로운 개척의 노정을 거듭해서 걸어오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이라도 효성의 도리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은 외로움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하나님을 위해서 더욱 더 효의 도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효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나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은 한 개인으로서 남아지게 하기 위하여 효의 도리를 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거느리며 효의 도리를 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아는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있어서 자신의 고독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