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집: 뜻을 품은 예수 1970년 12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25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제자"

예수께서 내심으로 그리던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 그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수습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규합하던 예수님의 진지한 태도를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던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말씀하여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은 단지 베드로 한 개체를 두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것이요, 그를 바라보면서 유대교를 회상하며 불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부른 것은 유대교를 사랑하고 싶고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부른 목적은 미래에 남아지지만 부름 그 자체에는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불렀다는 사실을 그때의 베드로 자신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개인의 생활을 중심삼은 내용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야 할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다, 내가 찾아야 할 교회는 이런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즉, 그 시대의 환경으로부터 환영받는 교회가 아니고 그 시대의 환경에 안주하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를 바라고 있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관점에서 제자들을 교육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있음은 오늘의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 부패한 유대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온 것은 현재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미래의 소망하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와 요셉의 족속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어느 한 순간에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관점에서 말씀을 했고, 그런 감정을 제자들에게 느끼게 해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고 있던 제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동문서답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유대교를 혁신시켜서 아버지께서 기뻐할 수 있는 제단으로 만들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의 내심은 그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초조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을 당신의 무지몽매한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성경 가운데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문답한 내용을 보더라도 제자들의 목적이라든가, 생활환경이 예수님과 상충된 것이 많이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요한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들이 출세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혁명의 기치를 들어 현재의 입장을 폭파시키지 않고는 바라던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출세를 꿈꾸는 그들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기가 막혔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예수님은 외로움에 사무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요셉 가정에서 서러움을 겪었을 때도 억울하였지만 소망의 뜻을 펴기 위한 하나의 동지로, 하나의 위안자로 불러서 키워 나온 제자들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는 더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3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들이 행하여야 할 모든 시범을 보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면서 서로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하는 장면은 얼마나 기가 막힌 장면입니까?

베드로는 베드로 나름대로, 다른 제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서 열두 파로 갈라진 것을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래 가지고는 이스라엘 나라를 새로이 세울 수 없고, 유대교를 새로이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고, 그러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대하는 사람들이 안위의 대상이 아니라 기가 막히게 하는 비참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적마다 예수님은 '내가 베드로 야고보 등을 사랑하는 것은 어느 개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유대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몇 번이고 몇번이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다 보면 그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는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슬픔을 느껴도 그 분풀이를 제자들에게 할 수도 없는 것이 예수님의 사연이었습니다. 그 분한 마음을 억제하고 도리어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면, 그들 나름대로 현재의 입장마저도 취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얼마나 가중되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느꼈을 것인가? 우리들은 이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렇듯 그들을 위로해 주고 권고해 주어야 할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보다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뜻을 펴기 위해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품었었고, 제자들을 규합하여 가르치는 과정에서 정성을 다 들였지만,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번번히 상반된 행동을 하는 제자들을 바라볼 때에, 내심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사무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