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집: 행복과 사랑 1969년 05월 18일, 한국 수원교회 Page #137 Search Speeches

어려웠던 일본선교

일본은 원수의 나라지만 그런 일본이 앞으로 한국을 위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십여년 전 자유당 때 감옥에 들어가고 쫓기는 몸으로도 빚을 얻은 돈을 가지고─그때 돈이 어디 있었겠어요?─밀선을 태워서 일본에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십년만 두고 보라. 이것이 법치국가의 국민으로서 위법행위인 줄은 알지만 틀림없이 아시아에는 자유롭게 이렇게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 내가 지금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더라도 이 일을 하겠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한 내 신념과 행동을 역사가 보증할 날이 올 것이다' 생각하고 단연코 행하였습니다. 그때 통일교회 식구들은 굶다시피 하는 때였어요. 사진을 팔아서 겨우 그날그날 사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돈으로 백오십만원 정도의 빚을 얻어서 밀선을 태워 보냈습니다.

그전에 충청도에 있는 갑사라는 절에서 선생님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잠을 안 자고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너를 위해 정성들이고 할 것이다' 며 죽더라도 임무를 다할 때까지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수를 통해 일본으로 가자 붙잡혀 오무라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일주일 이내에 도로 송환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한테 표를 받아 들고 생명을 걸고 갔던 사나이가 목이 잘려서 죽으면 죽었지 돌어올 수 있어요? 환송되기 위해 시모노세끼로 가던 중 열차에서 뛰어 내리려니 기차의 속도가 빠르고 굴이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모노세끼에 도착되어 다시 수용소에 갇혀서 송환되기만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 꾀를 내어 금식을 했답니다. 일주일, 열흘, 계속 금식 아닌 금식에 소금만을 먹고 나니 열병같은 것을 앓게 되어 까무러쳤다는군요. 그렇게 꾀병을 얻어 병원에서 치료한다고 입원해 있다가 도망을 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전도를 해서 지금의 칠팔만명의 통일교회 용사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일본 정부는 통일교회가 아니면 안 될 경지에까지 온 것입니다.

요전에 일본에 있는 한국 대사관의 홍보관을 선생님이 만나서 야단을 쳤습니다. `임자네들이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비판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이 통일교회의 신세를 져야 하는 입장인데도 반대하고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이제부터는 안 그럴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요전에 그렇게 보고를 했어요. 이제는 통일교회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선생님이 잘했어요, 못 했어요? 「잘하셨습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명령만 하게 되면 일본은 무슨 일이든 다 합니다.

공산당 놈들이나 일본의 시사한 패들을 잡아 없앨 수 있는 기반을 통일교회가 갖고 있다는 것예요. 이것이 더 커질 것입니다. 육칠 만에 가까운 건장한 청년들이 정예부대를 조직해서 지금 일본 공산당과 맞부딪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선생님의 취지로 동경사건을 이렇게 저렇게 처리하라고 지시하고 왔습니다. 앞으로 여기에 반대하는 공산당의 프락치를 어떻게 분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일본의 저명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하여 거기에 대한 계획을 짜 놓고 지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누가 지시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일본도 모르고 한국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이 알려지게 되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일본을 위해 공헌한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통일교회는 몰려도 괜찮아요. 중공과 소련이 노리고 있는 일본이 좌경화되면 한국도 어쩔 수 있습니까? 독 안에 든 쥐가 어디 가겠어요? 좌경화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고로 이것을 우경화하기 위해 선생님이 일본을 돕고 있는 거예요. 일본에서는 정치가들도 공산당 때문에 반공 색채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를 내세워서 조선대학 앞에 가서 반공강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원리연구회도 이 일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