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집: 수욕의 상처 1969년 12월 0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58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수욕의 상처를 어떻게 지울 것인가

통일교인은 더더군다나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욕을 먹지만, 내가 이 길을 계속 가는 것은 나 자신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늘 앞에는 떳떳한 길이지만, 그 길은 또한 수욕의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민족이 동원되어 반대할 것이며, 사탄세계 또한 죽어라고 아우성치면서 반기를 들고 대항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저울질당할 때에 죽음도 밟고 넘어설 수 있는 당당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도 인정하고, 사탄도 인정하는 가운데 죽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데는 하늘을 위해 사탄과 싸우다가 죽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것도, 목적을 놓고 보면 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세계가 바로 여기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죽는 모양은 같지만 `하늘을 위해서 죽었다. 하늘을 위해 사탄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친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요, 또 억울하게 상처입은 하나님은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더라도 죽음 그 자체로 끝나고 말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하나님을 위한 인간 세상에서의 충신 효자 이상의 충효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참신한 아들의 모습으로 설 때, 비로소 하나님은 새로운 마음으로 그 아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 바울의 서한을 본다면, 그 내용과 사정이 모두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개체를 대표하여 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분의 부활은 우리들 전체의 부활이라는 견지에서 피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오늘날 기독교는 영원한 사상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통일교회 안에서의 맹신을 버려야 합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은 칭찬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길을 가는 데에 있어서 아우성치는 사탄세계의 원수들을 막고, 생명을 걸고 그들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하늘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는 가장 가까운 길입니다. 거기에서 죽음을 삶으로 바꿔칠 수 있는, 즉 사선을 넘어설 수 있는 승리의 모습이 될 것을 스스로 다짐하게 될 때에, 하늘이 당한 수욕의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4백년 동안 무한한 학살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기독교가 가는 곳에서는 피를 흘렸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기독교 앞에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보더라도 대원군 시대에 그러했고, 일본을 보더라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히마하라 난에서처럼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에 피를 흘리며 죽은 충신과 효자의 비석을 남기지 않고 시작된 역사가 없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