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집: 뜻이여 성취하소서 1970년 01월 0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70 Search Speeches

예수님 이상의 심정을 소유하고 정성"-야 뜻을 이룰 수 있어

과거의 사람들 중에는 자기 혼자 뜻을 이루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협조를 바랐습니다. 자기가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하나님의 협조를 바랐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들도 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협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협조를 바라는 데 있어서도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보다 정성을 배가해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람들이 백만큼의 정성을 들였으면 우리는 천만큼, 만만큼의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협조를 바라는 데 있어서도 그들보다 월등한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을 갖추지 않고는 뜻 성사는 불가능하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시대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왔다 갔습니다. 그런 그가 30여년의 생애를 거쳐서 십자가를 향해 가는 최후의 순간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 ; 39)"라고 담판 기도하던 그 심각한 자리에서의 심정적 기준보다도 우리들이 월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던 것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는 데에는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예수가 하나님을 대하던 내정적 심정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내정적 심정이 달라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심정보다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심정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인연을 가지지 않고는 안 된다는 사실,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자신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하던 그런 심정을 지니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기도하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올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온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를 잃어버릴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예수의 사연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슬픈 사연이요, 딱한 사정이었습니다.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인 입장에 처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우리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민족보다도 민족과 국가와 나아가 세계의 문제를 대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자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요, 감당해야 할 시대적 책임으로 알고 몸부림쳐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자체가 예수의 심정적 인연 이상의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뜻이여! 성취하소서',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여기에는 소원이 미래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는 피의 대가를 치르는 탕감의 길을 가야 하며 십자가로 말미암은 죽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메울 수 없는 구덩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이 엄청난 뜻을 앞에 놓고 '뜻이여! 성취하소서' 하는 소원을 가지고 뜻을 대하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그 이상의 심정을 어떻게 체득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한 하나님의 4천년 섭리역사를 염려하면서, 이스라엘이 자신을 잃어버리면 이스라엘의 운세는 기울어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이방으로 옮겨질 것을 알면서 전체를 책임지고 있던 예수님의 입장이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이런 심각한 자리에서 몸부림치던 예수님의 심정을 능가하는 우리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않고는 예수께서 '뜻이여 ! 성사하소서' 하면서 가신 죽음길을 우리가 해원성사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참다운 사람이 되는 데 있어서 그것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