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집: 뜻을 품은 예수 1970년 12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21 Search Speeches

새로운 환경을 개척하기 위하- 몸부림치신 예수님

예수님의 뜻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를 믿는 사람들도 그의 뜻과 더불어 하나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바라던 그 나라도 그를 믿는 사람들이 바라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며, 예수님이 소원하던 그 세계도 역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소원하던 나라와 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또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싶은 생활환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생활환경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30여년간을 살던 그런 환경이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그 환경에서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거쳐 나가 새로운 소망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러한 생활환경을 개척하기 위해서, 그 당시의 생활환경과는 반대되는 행동과 반대되는 선교 활동을 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신의 고착된 사회 환경에서 자리잡고 살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환경을 혁신하고 내일의 소망의 터전이 될 생활환경을 갖추려고 했던 예수님이었던 것을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외로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하는 말씀을 통해 보더라고 그 당시의 예수님의 환경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와 하나님을 신봉하는 유대교의 소망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을 소원의 결실로 맞아들여야 할 유대교와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생활환경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벌어지는 환경이 처참하면 처참할수록 그 환경은 예수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일의 개척자인 예수님 앞에 큰 짐이 되었던 것이요, 어려운 환경을 타개하기 위한 내적 결의를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될 내적인 고충의 환경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던 예수님이기에 자기 일신의 행복을 바라는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이 살던 환경, 즉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예수님은 소망의 터전으로 삼지 못하고 안위의 한 터전으로 삼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심으로 몸부림치며 결의했다 할진대 그 내용은 현재 환경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의 환경을 타파해 버리고 미래에 상속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을 거기에 제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예수님의 생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고 피를 빨아먹는 로마의 악정권과 지도자 입장에 있었던 유대교의 교법사들에 대해서 제어할 수 없는 분함과 반항의 마음이 폭발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모든 족장들에 대해서도 어떤 미련을 갖고 대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계기에 그들을 모두 타파해 버리고 후손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물려주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내일의 환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순간 순간 내적 결의를 다짐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성서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