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집: 목표와 전진 1989년 07월 04일, 한국 일화연수원 (용인) Page #220 Search Speeches

문윤국 목사의 행적과 일"

지금 파주라고 하는 곳에 선생님의 뭐지요?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동생, 그분을 뭐라고 그래요? 「작은할아버지라고 합니다」 작은할아버지! 유명한 목사였어요. 그리고 애국자, 일본과 싸웠던 애국자지요? 3·1운동 때 북한에서 기독교를 대표했던 지도자였어요. 3·1절 독립선언문을 만들 때 말이예요, 선언문을 작성한 다섯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어요. 문장이 뛰어나고 말이예요…. 선생님이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 할아버지가 말이예요, 체격이 참 좋았어요. 선생님은 비교도 안될 만큼 좋았어요. 체격이 큰 멋진 남자였어요. 진보적이었어요. 일본헌병한테 잡혀서 2, 3년간 감옥살이를 했어요. 그래서 자기의 재산을 모두 투자해서….

그런데 그때에는 일본 사람들이 금융조합을 세워서 농민에게 돈을 빌려 줘 가지고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아 가지고 많은 일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정착시키고 한국 사람들은 만주로 쫓아냈어요. 그것을 한국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어요. 그 할아버지가 반대를 주도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때의 시세로 말하면 7만 엔, 8만 엔이나 되는 자기 형님의 토지를 말이예요…. 8만 엔이면 큰돈이었어요. 선생님이 그 당시 일본에 갈 때 3개월 분의 학비로 가지고 간 것이 1백 엔이었어요, 1백 엔. 그때는 그것도 큰돈이었어요.

그런데 8만 엔이란 돈을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헌납했던 거예요. 일본 헌병이 알면 큰일 나기 때문에 그 돈을 전부 놀음을 해서 잃어버렸다는 소문을 퍼뜨려 놓고는 밤중에 도망을 갔어요. 그래서 북한에 계속있으면 큰일이라고 해서 1945년 이전에 남쪽으로 왔어요. 그때도 그 할아버지는 집이고 뭣이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1의 주요 용의자였어요. 일본 헌병이 찾아다니기 때문에 떠돌이같이 떠돌다가 정선이라고 하는 곳에서 돌아가셨는데 문씨 성을 가진 제자의 산에 묻혔어요.

그 할아버지가 문장로의 꿈 가운데 나타나서 자기는 어떻게 해서 어떤 자리에 묻혀 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준 거예요, 그것이 아주 확실했기 때문에 글을 써서 가르쳐 준 그 주소대로 편지를 냈어요. 편지를 내면 반드시 그 답장이 오지요? 그렇게 해서 그 무덤을 찾아서 파주라고 하는 곳에, 지금 흥진이의 옆에 이장을 했어요. 그분은 애국자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나타나서 자기가 죽어 묻혀 있는 곳을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보면 선생님의 가문이 애국자의 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 한국적인 입장에서 전통적으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