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집: 승패와 현재 1971년 12월 0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25 Search Speeches

고차적인 소망과 고차적인 사상을 가져라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여기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 밥을 위해 사느냐, 옷을 위해 사느냐, 집을 위해 사느냐? 나는 그런 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통일교회를 위해 사느냐? 통일교회를 위해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 통일교회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보다도 나라를 더 사랑해야 됩니다. 그것이 공적인 노정이요. 단계적인 노정입니다.

개인보다도 가정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가정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식구들은 자기 한 개인만 사랑하는 식구를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정 전체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식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생시켜야 할 개인을 가정 앞에서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희생하더라도 가정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善)이 가는 길이요, 공적인 진전 단계입니다.

선(善)은 어떻게 발전해 나가느냐? 선은 보다 개인을 사랑하는 데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선(善)하려면, 몸을 중심삼고 몸이 하고 자대로 마음이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마음을 중심삼고 몸이 희생할 줄 알아야만 개인 자체가 사랑받을 수 있는 거예요. 희생이 없는 곳에는, 더구나 타락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희생의 조건을 가중시키지 않고는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 있어서의 효자는 효자 자체로 보면 비참한 것입니다. 왜 비참한 것이냐? 먹을 것이 있어도 마음대로 못 먹는 거라구요.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그것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야 된다구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칠십 팔십이 다 되었는데, 그분들이 이 땅에서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는가, 잡수시면 얼마나 잡수시겠는가, 밥상을 몇 번이나 받으시겠는가, 돌아가실 날이 나의 몇 분의 일밖에 안 남았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래 살지 못할 부모를 자기 생애를 기울여 정성을 다해 가지고 봉양 해야 됩니다.

효자는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목이 메어 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다가 혼자 흐느껴 울면 미친 사람이라고 할 거라구요. 어떻게 보면 미친 사람 같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먹지, 얼마나 먹고 싶은 음식이었을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러고 있어! 저것' 할 거라구요. 거 얼마나 비참한 것이예요? 그 울고불고 하는 꼴을 누가 좋아 하겠어요? 그렇지만 효자는 생활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좋은 경치, 좋은 산야를 바라보게 되면 아, 우리 어버이와 더불어…. 좋은 계절이 찾아와서 그 계절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에 서면 아, 나 혼자가 아니라 어버이와 더불어 보았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그리움으로 표상되고 눈물로 드러난 그 자리는 비참한 자리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자리, 그 자체를 보게 되면 괴로운 자리입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불행한 자리냐 하면, 행복이 깃드는 자리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눈물 흘리는 생활이 나쁜 생활이 아니라구요.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어도 나라와 공적인 것을 염려하면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고생하는 무리가 있다면, 보기에는 비참하겠지만, 거기에는 영원한 위로의 눈물이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찬양의 송영과 노래가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희망의 천국이 선물로서 마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불쌍합니까? 불쌍한 것 같지만, 비참한 것 같지만 승리의 권한을 얻은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자리가 그 자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예수님이 생각했다는 거예요. 비록 민족의 반역자로 국민 앞에 반동분자로 몰려 가지고 규탄받는 비참한 자리에서 쓰러지더라도, 십자가에 초라하게 사라져 가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억천만세를 중심삼고 꺾을래야 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철석같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했다는 것은 절대적이다. 이것은 내 생명을 꺾더라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랬던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도 그것을 사실로 공인하셨습니다. 비참한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공적인 길을 간 예수님을 망하게 한다면 하늘도 망하는 거예요. 뜻이고 무엇이고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참한 결과로 갔지만, 거기에서 소망이 절단된 것이 아니라 차원 높은 제 2차적인 소망의 출발기지가 그 비참한 무대로부터 싹터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됩니다. 역사는 이렇게 발전하는 거예요.

통일교회가 통일교회를 위해 산다면 통일교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통일교회 울타리 안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그런 사람들은 망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 울타리 안에서 사랑 한다고 하다가 싸움이 벌어진다면 수습방안이 없습니다. 통일교회 안에서 최고의 기준을 바라다가 싸움이 붙으면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두 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힘이 2분의 1로 약화되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통일교회의 목적이 나라를 찾기 위해서 모인 것이라 할 때는, 싸움을 했더라도 나라를 위해 찾아가야 할 길을 또 가야 되겠기 때문에 다시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소망을 가져라. 차원 높은 사상을 가져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