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집: 나의 뜻 1983년 05월 08일, 한국 본부교회 Page #198 Search Speeches

몸 마음이 완전히 하나 되어야 하나님이 임할 수 있어

그러면 '나'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 '나'라는 것은, 내가 앉아 있을 수 있는 동그라미의 자리라면 고착될 수 있는 자리요, 내가 섰다 하는 동그라미의 자리라면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뜻으로 세우고자 하신 자리다 이거예요. 우주가 뜻을 통하여 세워 나오던 것을, 타락한 이후에 상실하였던 것을 비로소 찾아진 자리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추구해 온 결론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민경식이도 왔구만. '당신 누구요?' 하고 물어 보면 '민경식이요' 할 겁니다. '민경식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할 때 '마음을 갖고 몸을 가진 사람이요'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은 어떻게 된 거야?' 할 때 제멋대로 왔다갔다하는 민경식의 마음이 아니라, 본래 하늘이 이상했던, 창조이상적인 그 주류 내관을 통해서 볼 때, 그 초점에 설 수 있는, 나의 자리를 확립하여 설 수 있는 그러한 자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그런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선 민경식이다 할 때는, 그 민경식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아시겠어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태어난 민경식이가 될 수 있다 이거예요. 민경식이 알겠어? 「예」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 안 된 자리에 있는 민경식 가운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 있느냐?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물이 있다면 사탄물 가운데 빠진 자입니다. 사탄의 경계선에 걸려 있는 겁니다. 사탄의 필요에 의해서 거기서 작용하면 그 작용권 내로 나는 할 수 없이 끌려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신자들이 '기독교를 믿는다'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어디에서부터 믿느냐? 기독교를 믿는 신앙의 출발이 어느 기점에서부터 출발하느냐? 이게 문제예요. 오늘날 '통일교회를 믿는다. 오늘 선생님이 여기 와서 말씀하신다. 가 보자' 할 때 '가 보자' 하는 그 기준이 어느 자리냐? 영점 자리에서부터 도수를 따지고 높이를 따질 때, 백도가 있다면 한 80도 자리냐, 영점 자리냐, 영점 이하 자리냐? 어떤 거예요? 이게 문제입니다.

영도에서 백도까지 올라갔다면 그것이 수직선이냐, 혹은 45도 선이냐, 90도 못 되는 88도 9부 선이냐? 그거 심각한 문제예요. 이것이 완전히 90도를 갖춘 자리에, 수직선의 자리에 서 가지고…. 아무리 여기에 180도권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필요 없어요. 단 하나 영점 기준이 될 수 있는 중앙에, 중앙선의 영점 자리, 새로이 좌우로 하나, 둘 서 나온 그 영점 자리에, 그 센터에 연결될 수 있는, 내가 고착될 수 있는 본연의 뜻의 자리인 그 무엇이 있을 겁니다.

그 자리에 있어서 그 뜻을 중심삼은 마음이 일원화된, 성화된 나를 갖추어 가지고 그 마음 가운데 있는 눈, 마음의 눈도 있을 거예요. 그 눈도 성화요, 귀도 성화요, 팔다리도 성화요, 우리에게는 영적 오관이 있는데 그 오관의 모든 기관이 성화된 기관입니다. 여기에 반항 없이 백 퍼센트 순응할 수 있는 나, 그런 마음─영인체의 사촌이라면 사촌이예요─을 중심삼고 몸이라는 것이 완전히 그냥 그대로 딱 90도라면 수평선을 완전히 구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우로 갈 때, 몸뚱이는 좌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우로 가려고 할 때부터 몸뚱이도 우로 가려고 하고, 마음이 좌로 가려고 할 때 몸뚱이도 좌로 가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상반된 자리에 서지 않고 하나의 일체적인 자리가 될 수 있는 나인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선 나, 그런 나라면 하나님의 뜻에서 찾고자 하는 나라는 본래의 개념의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봐야 되는 거예요.

이러한 자리를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다 잃어버리고 이것과 상관없는 자리가 되어서 여러분의 속사람은 뭐 내 나라, 대한민국 사람, 아들딸, 남편, 뭐 너더분한 부모, 너더분한 환경 가운데서 어정어정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연의 뜻의 그 원칙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하나님이 그걸 바라보고 '소망이 네게 있다' 할 수 있는 마음적 심정을 지닐 수 있겠느냐? 그거 심각한 문제예요.

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출발했느냐? 오늘날 나를 주장하는 그 기점이 어디냐 하는 것을 재천명해야 됩니다. 어떤 영통한 사람들은 '내가 영계를 통해 보니 아버지가 이러고 이런다. 내 말 들어라' 이래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를 완전히 확정지은 자리에서 받은 명령이냐, 확정짓지 못한 자리에서 받은 명령이냐? 심각한 문제예요. 요사스러운 나, 더럽혀진 나, 역사적인 한을 탕감하여야 할, 구원섭리 과정의 통과가 필요한 나 자신 위에 임한 하나님의 명령이겠느냐? 그 명령은 본연의 나와는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알아야 됩니다.

오늘 제목이 나의 뜻, 내 뜻인데, 나라는 개념이 문제 되는 거예요, 언제나. 여러분이 어디에 서 있느냐? 어디에 앉아 있느냐? 오늘날 대한민국 안에 서 있어도 안 돼요. 구원섭리는 본래 필요치 않았어요. 세계 안에 앉아 있어도 안 된다구요. 여러분의 부모를 생각하는 그런 터전 위에 앉아서도 안 된다 이거예요.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지닌 자리에서 '뜻이 있다. 여기서 뜻을 이루어 천국가자' 한다 해도 말로는 천국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사실 천국은 요원합니다.

불변의 마음, 우선 내게 필요한 것은 불변의 마음이예요. 이 불변의 마음을 어디서 가져올 것이냐? 이게 문제라구요. 불변의 마음을 어디서 가져올 것이냐? 내 개인을 넘어 가지고, 가정을 넘고,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고, 천지라는 것을 넘고,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 세계에 일치될 수 있는 불변의 심정적 진로, 주류노정은 어디뇨? 이건 심각한 문제예요. 방향을 어떻게 잡고 가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구요.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뜻을 찾아가는 사람은 자기를 주장할 수 없다 이거예요. 하나에서부터 백·천만사가 아무리 많아도 나를 주장할 수 없는 겁니다. 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는 인식을 확실히 가져야 되겠어요.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내 눈이 보고 좋아하는 이 나, 나는 누구냐? 내가 먹고 놀면서 좋아하는 그 자리가 어디냐?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생활무대, 그 무대가 어디냐 할 때에, 구원섭리를 거쳐가는 과정의 자리지 구원섭리의 자리를 초월한 자리는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정해야 할 자리인데 그 부정할 자리를 시인했다가는 뜻의 부정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거 확실히 알아야 돼요. 뜻의 부정, 본연의 뜻의 부정의 자리에 자처해서 서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게 근본 문제예요.

그렇기 때문에 뜻을 대하는 그 마음에 있어서 하나님이 영원불변한 뜻을 세워 나오느니만큼 나는 그 뜻을 내 뜻으로 전수받을 수 있는 것이 구원섭리의 길을 넘어서의 희망의 초점이라 할진댄, 현실에 나서서 불변적인 자체 확립을 마음세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텐데 불변된 내 마음 자체는 어디에 있느냐? 이것이 여러분의 당면 과업 중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 뭐 누가 안 알아주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못 가고, 뜻의 길이 이렇게 힘들어서 갈 수 있느냐 하는 사람이 있어요. 벌써 그 말 자체는 결정적인 자리에서 나를 생각하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 설까 말까, 섰다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사람이지, 확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죽더라도 이 자리에서 죽는 거야. 미련 없이 죽는 거야' 이래야 돼요. 여러분, 그래요? 「예」 대답은 잘하지. 그거 간단하지 않다구요 '예'라는 말이 그 내용을 분석하면 얼마나 복잡한지 알아요? 이건 생각할 문제예요.